운동 전도사 ‘목사 빌더’“자, 다리 넓게 벌리시고 스쿼드 100개 들어갑니다. 시작~”그의 신호에 맞춰 사람들이 일제히 운동을 시작한다. 자연스레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 헬스장에서나 볼 법한 광경이냐고? 아니다. 그를 만나면 누구라도 이렇게 집에서, 밖에서 망설임 없이 운동을 시작한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그렇다.온·오프 공간에서 운동을 이끄는 이는 자신을 ‘건강 전도사’로 소개하는 유누리 씨(37, 풀향기교회 부목사・사진)다. 그의 신분은 목사. 30대의 젊은 목사니까 그냥 운동을 좋아하고 권하는 정도이겠거니 하기 쉽지만 절대
최근 ‘수어’가 미디어를 통해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방탄소년단이 보인 국제수어 퍼포먼스가 전 세계 농인(Deaf)과의 소통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코로나19가 시작되면서 재난 당국의 정례보고는 반드시 수어 통역사의 배석 하에 진행되는 유례없는 변화도 보았다. 오랜 세월 ‘수화’라고 불렸던 ‘한국수어.’ ‘수어’에 대한 최근의 관심만큼 우리의 인식도 변했을까. 농인들과 한 길을 걸어 온 김유미 원장(한국농문화연구원)이 물음을 제시했다.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과 1학년 시절, 수어를 처음 배우기 시작해 30년 넘게 농인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왔던 김 원장은 여러 직함을 거치며 배우고 익힌 것들을 농인과 수어로 나누는 작업을 가장 좋아한다. 2016년 를
생명 마스크 “그동안 250만 장 이상의 마스크를 국내외 이웃들에게 보내는 운동을 이어 왔습니다. 이번에 쿠데타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미얀마 난민들에게도 50만 장의 마스크를 보낼 수 있어 너무 감사했어요.” 마스크 250만 장? 정부 산하단체나 거대 구호단체의 이야기가 아니다. 평범한 세 명의 아재 청년들이 함께한 결과다. 석호길, 이해문, 김태양 씨. 50대의 중년이라는 공통점 외에 이들은 같은 점들이 많다. 모두 크리스천이어서 이웃을 돌아보며 생명을 살리는 일, 선교의 비전을 품고 살아왔다는 것. 유독 꿈에 대해 나누고픈 이야기가 많다는 것도 이들의 공통점이다. 석호길 씨는 한국마스크산업협회에서 회장의 직함을 갖고 있다. 코로나가 시작된 당시부터 국내 마스크의 제작과 유통, 지원의 구심점에 서 있었
“삐익~ 삑~ 안녕하세요! 학생~ 너는 우리나라의 희망이란다. 늘 건강해야 돼~ 오늘 하루도 행복하세요. 감사합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거의 매일 같이 거듭되는 광경. 길을 오가는 행인들도, 신호등에 멈춰 선 버스 운전사도 익숙하고 자연스런 아침이다. 심지어 다정한 인사를 주고받기도 한다. 20m 남짓의 공항대로 건널목은 5분마다 인사를 나누는 만남의 광장이 된다. 무려 40년의 세월을 한결 같이 이어온 열혈 봉사자가 낳은 결과다. 빨간 셔츠를 입고 춤을 추듯, 도로 위를 주름잡는 이철희 자원봉사자(75세)는 어린 학생과 시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작은 거인이다. 무엇이 그를 극강의 봉사자로 만든 걸까. 무엇을 위해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걸까? 작은 거인 ‘빨간 옷의 작은 거인’, ‘방화동의 마이클 잭슨’
대통령의 구두 이야기로 SNS를 달아오르게 한 일이 있었다. 4년 전, 문재인 대통령의 낡은 구두 사진이 세간의 관심을 모은 일. 그리고 그구두가 청각장애인들이 손으로 만든 수제화라는 사실도 함께 화제가 되며 ‘아지오’라는 브랜드는 많은 이들에게 신속히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명세를 탔을 그 즈음 이미 회사는 문을 닫은 상태였다. 앞이 캄캄한 소년 소년은 점점 앞이 보이지 않았다. 시각장애인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소년 앞에서 혀를 찼다. 무정한 현실 앞에서 가족들도 억장이 무너졌다. “나가 죽으라” 어머니는 독한 말로 아들의 처지를 비관했다. 마음 독하게 먹으라는 아버지의 말씀대로 소년은 보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야 했다. 그런 소년에게 유일하게 덕담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마
“나도 아버지처럼 이발쟁이 할래요.” 가난이 지긋지긋했던 낭랑 18세의 소녀가 아버지께 도발하듯 한 마디를 질렀다. 당연히 여자가 무슨 이발사 일을 하느냐는 면박을 들었다. “왜 못해요. 아버지가 하시는 거 나도 할 수 있다고요.” 아침은 보리밥, 점심은 거르기 일쑤고, 저녁은 시래깃국에 콩나물을 먹던 시절이었다. 소녀는 변함없이 주리고 궁핍한 하루가 너무 싫었다. 지긋지긋했다. 가난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돈을 더 버는 것뿐. 그래서 직접 나서기로 했다. 순진한 소녀는 이듬해 성인이 되자마자 이발을 배우기 시작, 마침내 여성 최초로 이발사 면허 시험에 합격하는 주인공이 된다. 신세대 이발사에서 최고령 이발사 19세에 가위를 잡은 소녀는 67년이 지난 지금까지 현역으로 일하고 있다. 전쟁과 혁명, 결혼과 출
영화평론가 최은(사진)의 이 출간되었다. 영화 혹은 문학, 제인 오스틴, 그것도 아니면 배우인 키이라 나이틀리나 제임스 맥어보이 어느 하나만 애정해도 열광할 책이다. 제인 오스틴의 ‘12권의 책’과 그 책을 원작으로 삼은 ‘26편의 영화와 드라마를 담은 책’이기 때문. 오늘날까지 생명력을 가지고 재생산되는 제인 오스틴의 작품을 하나하나 살피며 성실하게 해석하고 있다. ‘오스틴 덕후’ 최은 평론가를 만나 직접 책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이 첫 책이라고 해서 놀랐다. 서문에 “첫 책은 써야 하는 글보다는 쓰고 싶은 글들로 채우고 싶은 바람”을 말했는데, 왜 제인 오스틴이었나. - 일단은 정말 순수하게 문학이 영화화된 작품에 매력을 느껴서였다.
“수도꼭지의 아이러니는 누군가가 씻는 데 도움이 되고자 만들어졌지만 결코 스스로 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의 집이라면 그가 누구든 그곳이 어디든 가서 군말 없이 치우는 것이 제 일입니다만 정작 제가 죽었을 때 스스로 그 자리를 치울 도리가 없다는 점이 수도꼭지를 닮았습니다.” - , 248쪽 그 작가가 했던 일들 트라우마 클리닝(Trauma Cleaning). 고독사·자살·살해 현장, 쓰레기 집이나 동물 사체 등을 치우는 특수 서비스다. 즉, 어떤 이유로 오염된 현장을 복원하는 일이다. 하드웍스(Hard Works) 김완 대표(사진 우)는 이러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특수 청소업체를 운영한다. 그러나 그의 또 하나의 정체성은 ‘작가’. 최근 그의 저작 가 출간되어
10년 전 한국 CCM(Contemporary Christian Music)에 혜성같이 나타난 이가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유성. 번쩍하고 사라지는 혜성과 달리, 유성체로 날아와 척박한 토양 위에 떨어진 운석과도 같은 이였다. ‘나무엔.’ 신인이라고 하기에는 그의 연배와 공력이 꽤 묵직했다. 무엇보다 그의 노래에는 울림이 있었다. 퍽퍽하고 거친 가슴에 그의 노래는 운석처럼 날아들었다. 나무엔이라는 나무 ‘시편 23편’, ‘쉼’, ‘선한 능력으로’… 그리고 여러 찬송가. 나무엔을 연상하면 떠오르는 곡들이다. 편안하면서 따뜻함이 배어있는 노래. 잔잔하면서도 진중함이 밴 나무엔은 그의 보따리를 하나하나 풀기 시작했다. 나무엔(본명 김성호)은 인터뷰가 꽤 오랜만이라고 했다. 자신은 인터뷰 대상이 될 만한 사람이 아
미용실, 과일가게, 김밥집, 철물점. 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골목 한 편에 눈길이 머무는 지점이 있다. 뱅뱅 돌아가는 이발소등 사이에 있는 동네서점. 우리가 ‘책방’이라고 불렀던 곳이다. 한 때 익숙했으나 지금은 낯선 곳이 된 곳. 그래서 반가운 걸까. 경기도 부천시 역곡동의 한 동네. 10평 남짓한 책방 ‘용서점’엔 잔잔한 음악이 흐른다. 책내음 보다 커피향이 날 것 같은 분위기. 여기저기 자유롭게 꽂혀 있는 책들이 정겹다. 책에는 깨알 글씨들이 적힌 색종이들이 붙어 있다. 책의 포인트를 짚어주는 설명. ‘1000원’ 특가판매대엔 구순의 동네 어르신께서 책을 뒤적이고 인천에서 온 여성은 이내 책 한 권을 구입한다. “저희 은 처음이시죠? 괜찮으시면 회원가입을 하실 수 있어요.” 저렴하게 구입
주후 70년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이 파괴된 이후, 유대교는 바리새 서기관들의 주도하에 새롭게 정비되었다. 바리새적인 가르침과 실천에 순응하지 않는 모든 집단을 구별해서 추방하기 시작한 것이다. 맨 먼저 표적이 된 대상은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의 유대 기독교인들이었다. 그러나 그 땅에 오늘날의 이스라엘이 건국된 후(1948년), 여전히 소수의 기독교인들이 있다. 메시아닉 쥬(Messianic Jew, 건국 당시 약 100명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3만 5천명 이상) 영화 (2010)은 아직도 진행형인 정통 유대인들의 기독교인에 대한 핍박을 보여준다. 오늘날 그 땅에서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소수자의 설움과 아픔을 견뎌야 함을 의미한다. 최근 한국을 방문한 이스라엘-팔레스타인에서 선교사역을 하고 있는 정규
사람들은 부모의 사회, 경제적 지위가 개인의 사회, 경제적 지위를 결정한다고 주장하며 흙수저에서 금수저까지로 나눈다. 처음에는 우스갯소리로 시작되었을지 모르지만 이 수저 계급은 우리 안에 상당히 파고들어 내면화되었다. 그러다보니 ‘흙수저’라 느끼는 사람들이 삶의 도전조차 어렵다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에 대해 권홍헤어 대표이자 최근에 책 ‘가장 귀하고 값진, ’(와웸퍼블)를 저술한 권홍 대표는 다르게 말한다. “저야말로 흙수저였습니다. 아니, 수저 형상도 갖추지 못할 정도로 어려웠지요. 가난하고 몸도 허약하고 어디를 가나 주눅이 들어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저의 그런 찌질함을 완전히 깨버리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지요.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만물의 창조주인 하나님이 내 아버지시라니. 그때
시몬 베이유를 소환한다. 프랑스 파리에서 유대인 부모 아래 태어나 세계적인 명문대학교를 졸업하고 노동운동가로 활동하다가 2차 세계대전의 틈바구니에 끼여 영국 런던에서 난민 지원 활동을 벌이던 중 서른넷의 나이에 절명한 여성! 시몬 베이유에게서 운동과 영성의 결합을 본다. 모든 사회적 실천의 밑바탕에는 고결한 신앙의 힘이 놓여 있어야 한다는. 수원역 앞에서 케밥 식당을 운영하며 난민 구호 활동에 열심을 내며, 매년 헤른후트 성경묵상집을 펴내는 홍주민 목사(한국디아코니아협동조합 대표)의 삶이 딱 그렇다. ▲ 가게 이름이 독특합니다. 왜 YD 케밥 하우스인가요? = YD는 예멘의 ‘Y’와 디아코니아의 ‘D’를 합친 거예요. 예멘 사람을 섬긴다는 뜻이지요. 작년 초 제주 예멘 사태를 기억하지요? 내전 때문에 국가가
몇 년 전 SNS 인스타그램에서 만나 팔로우 하게 된 한 작가의 성경말씀 캘리그라피 작품은 한 번에 눈을 사로잡을 만큼 신선했다. 세련된 디자인은 물론이거니와 손글씨로 말씀을 쓰고, 그 말씀과 어울리는 일러스트를 직접 그려 넣은 것이 눈길을 끌었다. 한두 번 올라오거나 띄엄띄엄 올라오는 것이 아니라 몇 년 동안 꾸준히, 지속적으로, 매 작품마다 정성을 다해 올리는 작가의 작가명은 ‘붓양’. 그렇게 성실히, 정성을 다하는 동력이 무엇인지 늘 궁금했었다. 그래서 최근 붓양의 캘리그라피 말씀달력 (규장출판사)가 출시되었다는 소식은 도대체 누가, 왜 이렇게 정성스럽게 말씀을 써내려왔을까를 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안녕하세요, 붓양 양윤선 작가(사진)입니다. 디
근곡 박동완은 3·1독립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으며, 전 생애에 걸쳐 독립운동가, 기독교 언론인, 교육목회자로서 여러 사역을 감당하였다. 민족의 암흑기에 개화, 독립과 민주의 물결을 몰고 온 기독교와 민족주의의 결합으로 생긴 기독교 민족주의에 대한 연구에서 중요한 위치를 지닌다. 역사에 묻혀있다 싶은 이 분을 손자 부부가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아 그 업적으로 상을 받은 이야기다. “누군가 동료들과 보조를 맞추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른 북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북소리가 박자에 맞든 종잡을 수 없든 간에 자신의 귀에 들리는 북소리에 맞춰 걷도록 하라.” 을 쓴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말이다. 지난해 11월 16일, 한국인문사회과학회 학술대회 때 한국인문사회과학상
이민목회 현장이 점점 어렵다고 합니다. LA평강교회 역시 40여 년의 세월 동안 그 어려운 광야를 여러 번 들락거렸습니다. 그런데 금년에 그 이민교회 현장에서 훈훈한 감동 이야기가 가득 들려옵니다. 그 감사이야기 중심에 있는 이상기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40년을 목회해도 여전히 새롭게 깨닫고 배우고 있습니다. 아니 전보다 더욱 진하게 배웁니다. 목회현장에 임재해 계시는 주님이 느껴질 때 은혜가 임하는 걸 피부로 절절하게 느끼니까요. 새로운 예배당으로 옮겨 와서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듯 목회하는 기분입니다. 모든 교우들이 예배당 뜰에 감사의 나무를 심고, 그 나무들을 돌보면서 힐링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은혜가 너무나 놀라워서 감히 무어라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LA평강교회 이상기 목사는 요
‘한국 교회 초기 기독교인들은 진실했고 정직했으며 성경의 정신을 따라 살고자 하는 각오가 있었다. 예배당이 있는 마을에는 탐관오리들이 부임을 꺼렸다. 뇌물도 받을 수 없고 못된 짓도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세상은 교리가 아니라 그들의 성결된 생활을 본 것이다. 그래서 교회로 들어왔다.’ 교회학교 교사들을 위한 월간지인 발행인으로 35년간 일했고, 현재 늘빛교회를 개척하여 36년간 목회하고 있는 강정훈 목사가 최근 내놓은 (두란노)이 교계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강 목사는 한국 교회가 앞서 인정받았던 영향력을 잃은 이유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죽을 때까지 점진적으로 거룩해져 가야 한다는 ‘성화’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 됨은 ‘고백’으로 가능하지만
종이를 조각한다. 아무 것도 없는 평면의 종이 위에 숨을 불어넣는다. 전체 밑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각각의 그림은 부분별로 밑그림을 따로 준비해야 한다. 입체적인 형태를 어떻게 드러낼 것인지에 대한 계획에 따라 종이를 구부리고, 접고, 높낮이를 다르게 붙이는 등 복잡한 작업이 들어간다. 종이와 풀, 가위 또는 나이프 등을 가지고 만드는 조각으로, 예술작품이 모두 그러하겠지만 종이라는 특성상 정말로 정교하고 집중된 열심이 필요하다. 그렇게 오랜 시간 종이를 조각하여 평면의 이야기를 입체로 살려내는 작업을 해온 공진두 작가(53)와 어깨 너머 아버지의 작업을 보고 자라서, 이제는 번듯하게 자기의 이름을 걸고 작가의 길을 걷게 된 공주은 작가(22)를 만났다. 부산 사직동교회에서 열리고 있던 두 작가의
15년 동안 어린이 교육사역과 소년원 및 마약중독자 사역을 해온 최종현 김정영 캄보디아 선교사 부부(사진 위)가 한국에 돌아왔다. “지금까지 지나온 길을 돌아보며 할 수 있는 한 가지 고백은 ‘놀라운 은혜였다’는 한 마디 뿐입니다. 지켜주셨고, 공급해 주셨으며, 인도해 주셨습니다.” 최종현 선교사는 2004년 7월 한국에서 담임목회를 조기은퇴하고 캄보디아로 떠났다. 그때 나이가 환갑이었다. “지금부터는 내가 직접 다른 이들을 실제로 돕는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먼저 알고 있던 캄보디아 고아원으로 들어갔어요. 그러나 현실은 고아원 밖의 아이들이 더 참담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옷도 학교도 열악하고 희망이 없는 곳이었지요.” 최 선교사가 들어간 시소폰 지역은 태국과 가까운 국경 접경지역이었다. “자기 고향 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