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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마루에 있던 양쪽 문이 열리는 흑백티비는 동네 2대뿐인 권력물체였다. 안테나를 조정해가며 지지직거리는 방송을 한 번만 보자며 친구들이 들고 온 옥수수와 감자 덕에 우리 집은 사시사철 풍성했다. 얼마 후 유선전화가 일반화되더니 어느새 흑백티비는 색을 뒤집어쓰고 우리 집 안방에는 14인치 칼라티비가 자리를 차지했다. 이렇게 1980년에 시작된 칼라티비의 시대가 벌써 40년이 넘었다. 흑백티비도 없는 사람들이 많던 그 시대 칼라티비가 주는 상대적 박탈감을 고려해 칼라티비 보급은 생산과 수출에 비해 꽤 늦어졌다. 칼라의 시대 칼라의 시대가 시작되고 나서, 인생도 칼라풀 해졌다. 우리의 칼라 인식도 달라지기 시작하면서 우리의 찬란한 시절은 화려해졌다. 사람들은 배우들의 푸른 눈화장과 붉은 입술을 보고 화장품
이호선의 '나이 들수록'
이호선
2021.09.01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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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살다보면 조금씩 더 자유로워질 거라 생각했다. 나이를 먹고, 아는 것이 많아지고, 두려움이 줄어들고, 용감해지고, 더 자유로워질 거라 생각했다. 교실 유리창을 가린 창살이 가끔 감옥처럼 느껴지고, 매일 같은 차림의 교복이 죄수복처럼 느껴지던 10대 시절의 믿음이었다. 어서 지긋지긋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이 되어 화장을 하고 캠퍼스를 거닐며, 방학 때면 여행을 떠날 수 있는 것이 어른의 삶이라 생각했었다. 그렇게 꿈꾸던 대학생이 되고, 직장에 들어가고,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고, 어른이 되었다. 그 시절보다 넓은 세계를 알게 되었고, 하고 싶은 것들도 늘어났지만, 해야만 할 일들, 해내지 않으면 안 될 일들은 더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 알게 된 것이 많아진 만큼, 하지 말아야 할 일도, 사람
위서현의 마음듣기
위서현
2021.09.01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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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노래인지 몰라 구순이 넘은 시아버지가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배에 있는 힘을 다주고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시작하는 앞머리마다 힘을 주어 외치듯 1절을 연거푸 불렀다. 며느리인 나는 그 옆에서 오른팔을 왼쪽 가슴에 대기도 하고 응원을 하듯 오른손을 연신 흔들기도 했다. 세 번째로 애국가가 열창될 때에는 그 앞에서 춤을 추었다. 네 번째쯤 1절이 반복되는 시점에 시아버지는 노래를 멈추고 다리가 아프다며 소파에 앉았다. “아버님, 지금 부른 노래가 뭔가요?” “몰라…. 그냥 불렀어. 이게 뭔 노랜가 나는 몰라!” 치매를 앓고 있는 시아버지는 목청 높여 반복해서 불렀던 그 노래가 무엇인지 몰랐다. 뜨겁게 불렀던 노래의 기억은 그렇게 차가웠다. 잊히지 않는 것들 많은 것들이 잊힌다는 질병 앞에서 잊히지 않는
이호선의 '나이 들수록'
이호선
2021.07.01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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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지 쉴 수 없었던 휴가 상담 첫 날, 지영 씨는 지난 휴가에 도무지 쉴 수 없었던 경험부터 토로했습니다. 대기업에서 일하는 40대의 그녀는 자신이 일중독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에 상담실을 찾았지요. 그런데 일 덕분에 성취감을 누리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잃을 정도로 일에 매몰된 워커홀릭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열심히 일하는 동안은 아무렇지 않다가도, 아무 일 없는 휴일이나, 몰아치던 프로젝트를 하나 마무리 짓고 나면 이상하게 기분이 가라앉고, 울적한 생각이 슬며시 파고들며, 일을 놓으면 자신이 하잘것없어지리라는 생각에 눈물이 터지기도 했습니다. 20년 가까이 쉼 없이 일하느라 누적된 피로가 터진 것인지, 그저 일만 하는 자신이 익숙해져버린 것인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그래
위서현의 마음듣기
위서현
2021.07.01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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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책 제목은 삶과 그 여정에 대한 많은 생각들을 던져준다. 이 화두를 우리시대 노년들에게 던진다면 아마 이렇게 될 것이다. ‘노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무엇’으로 산다는 말은 생애 의미와 생애를 둘러싼 환경을 포괄적으로 의미할 수 있다. 과거 노년은 ‘나이’가 ‘값’이었다. 나이 값은 살아온 세월과 세월교관의 훈련에 따라 생겨난 경험과 습관, 그리고 긴 세월을 통과하며 정금같이 얻어낸 지혜로 그 값을 했다. 세상의 지식과 경험을 관대함의 포대기에 싸 젊은 세대들에게 전달했고, 생애 후학들은 세월과 지혜가 응축된 한마디를 듣고자 귀를 기울이고 그 세월과 그 나이를 존경했다. 지금의 값은? 그런데 지금의 나이 값은 그야말로 헐값이 되었다. 떨이도 이런 떨이가 있나 싶을 정도
이호선의 '나이 들수록'
이호선
2021.06.01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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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살 무렵의 딸아이가 아침에 깨자마자 하는 일은 침대에 그대로 누운 채 간밤의 꿈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이었습니다. 양치질을 하러 일어나기만 해도 꿈이 머릿속에서 다 사라져버린다는 이유였죠. 아이의 꿈에는 동화 속 주인공이 나올 때도 있었고, 엄마가 자기를 섭섭하게 만들 때도 있었고, 과자 나라에서 마음껏 과자를 고르는 일도, 돌고래와 이야기를 나누는 일도 일어났습니다. 꿈은 현실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나이에도, 꿈을 한 장면이라도 더 기억하려 하고, 하나도 빠짐없이 전하려는 아이의 모습은 참 신기했습니다. 어른이 된 우리도 꿈은 현실과 무관하다 믿으면서도, 지난밤의 꿈을 말하고, 좋은 꿈을 꾼 것 같은 기분에 꿈풀이를 찾아보기도 하고, 기억도 잘 나지 않는 흐릿한 꿈 때문에 하루의 기분이 좌지우지될
위서현의 마음듣기
위서현
2021.06.01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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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실에 찾아온 40대 중반의 그녀는 몹시 지쳐 보였습니다. 매일같이 그녀를 다그치고 닦달하는 누군가에게 시달리는 듯했지요. “원래 제가 걱정이 많은 사람이긴 한데, 요즘은 정말 아무 것도 못하겠어요. 살 수가 없네요.” 첫 마디와 함께 눈물을 쏟아내던 그녀는 20대에도 걱정과 불안이 많았지만, 아이를 낳고 가족이 늘면서 걱정도 함께 늘었다고 했습니다. 남편이 차 사고는 나지 않을까, 첫째가 친구들한테 왕따라도 당하지는 않을까, 막내가 유치원에서 뜨거운 물에 데기라도 하지는 않을지, 나쁜 친구를 사귀지는 않을지, 오늘 춥게 입고 갔는데 내내 떨다가 감기라도 걸리는 건 아닐까, 손톱을 안 깎아 보냈는데 친구와 놀다 상처라도 입히는 건 아니겠지. TV를 켜면 온갖 사건사고 얘기에 불안만 더 커져가고, 눈을 감고
위서현의 마음듣기
위서현
2021.05.01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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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이 걱정된다 ‘아, 우리 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라때는!’을 외치지 않더라도 요즘 애들이 참으로 어렵다. 똑똑하기는 이루 말할 수 없건만, 말 붙이기도 어렵고 뭐라도 하자고 하면 어찌나 냉장고인지. 게다가 어쩜 그리 ‘지 것’은 잘 챙기는지! 어떤 때는 무시당하는 것 같아 자존심 상하고, 간혹 두렵기도 하다. 내 자식이건 남의 집 자식이건 얘들하고 앞으로 긴 세월을 같이 ‘세대’로 살아야 하는데 어찌할까나! 애가 있거나 애가 컸거나, 심지어 애가 없어도 사회생활 좀 해보고 인간관계 좀 해봤다는 사람들은 모두가 신세대들과의 소통이 걱정이다. 그 옛날 기원전 196년 고대 이집트 로제타 석에도 ‘요즘 애들은 버르장머리가 없다’고 써있다 하고 인류는 원래 반항하며 성장해 왔지만, 문헌은 문헌이고 기록
이호선의 '나이 들수록'
이호선
2021.04.01 16:28